소리이야기

[소리칼럼] 서로 그렇게 기대고 받쳐주는

“휴대폰 번호만 불러! 내가 다 쓸게.”
그 친구는 오직 출입명부에만 시선을 두고 신속하게 네 명의 신상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청각장애인인 나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명의 번호를 정확하게 듣고 받아 적는 일.

어느 날, 비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합정역 근처에 있는 갈빗집에 다녀왔다. 한 때 TV광고로 ‘핫’했던, 갈비 무한리필로 유명한 가게다. 저렴하고 맛있어서 종종 먹으러 가곤 한다. 아직 이른 오후인데도 유명세에 걸맞게 벌써부터 대기 줄을 서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식당 앞이 바로 차도였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둘 틈조차 없이 앞뒤 빼곡하게 줄을 서고 있어서 다들 예민했다. 모두 마스크를 한 번씩 꽉 가다듬고 서로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간신히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직원이 들어가시기 전에 코로나 수기 명부를 작성하셔야 한다고 외쳤다. 같이 온 친구가 QR코드는 없냐고 묻자, 직원이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유명세와 다르게 왜 출입 명부는 궁색한 아날로그인가. 대기 줄에 선 사람들이 모두 입구에서 일일이 출입 명부를 작성하고 체온을 재고 있으니 줄이 빠르게 줄어들 기색이 전혀 없는 거였다. 사십 분을 넘게 밖에서 기다리고서도, 출입 명부를 일일이 쓰느라 여태 자리에 앉질 못했더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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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는 오직 출입명부에만 시선을 두고 신속하게 네 명의 신상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야! 휴대폰 번호만 불러! 내가 다 쓸게. 그게 더 빠르겠다.”
한 친구가 팔을 걷어붙이고 펜을 집더니 외쳤다. 그 친구는 오직 출입명부에만 시선을 두고 신속하게 네 명의 신상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네 개의 날짜와 시간을 썼다. 친구들은 한 명, 한 명 순서대로 자기 번호를 읊었다. 그는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확하고 빠르게 받아 적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내 번호까지 다 적은 친구는 시크하게 펜을 내려두고 직원이 안내해준 자리로 걸어갔다. 네 명이 전부 명부를 쓰고 체온을 재는 과정이 불과 3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나는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넘기고서 곧 먹게 될 맛있는 갈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한 채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었을 테다. 하지만 그 날은 조금 달랐다. 기다리느라 짜증이 가득 났던 중에 친구의 똑똑한 대처로 빠르게 착석할 수 있었더니 금세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부러워졌다.
청각장애인인 나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명의 번호를 정확하게 듣고 받아 적는 일.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내게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누군가는 30초면 끝낼 수 있는 일이 나는 온종일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었고, 거의 자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이 내게는 당연하지 않은 순간을 겪을 때마다 무척 서글펐다.

“우린 각자 못하는 게 있고, 잘하는 게 있는 거야. 그건 청각장애랑 전혀 상관 없는 거야.”
살면서 이렇게 깨끗하고 단단한 위로는 처음 듣는 기분이다.

“부럽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말이 나지막이 뱉어져 나왔다. 가게가 소란스럽고 번잡한 와중에서도 내 말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친구가 반응했다.
“뭐가? 갑자기?”
나는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한 채, 뭐가 부러웠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해명했다. 그런 상황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내 운명에 대한 푸념인지, 듣고 받아 적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친구에 대한 질투인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 하소연을 친구는 조용히 끝까지 귀담아 들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건네진 그의 우문현답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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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 그런 거 부러워하지 마. 부러울 게 뭐가 있어? 우린 각자 못하는 게 있고, 잘하는 게 있는 거야. 네가 못하는 건 우리가 하면 돼. 우리가 못하는 걸 네가 해줄 때가 또 있는 거고. 그건 청각장애랑 전혀 상관없는 거야. 그걸 청각장애 탓을 해버리면 정말 치사하고 비겁한 거야.”
살면서 이렇게 깨끗하고 단단한 위로는 처음 듣는 기분이다. 상대의 기분을 배려하면서도 서로를 깎아내리지 않는 세심한 태도. 자존감 높고 사려 깊은 사람의 건강한 철학. 나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맘 놓고 웃으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깊게 남은 여운으로 그 날의 남은 시간을 내내 명징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갈비도 맛있게 먹었다.

 

 

나는 왜일까, 나만 그런 걸 수도 있기 때문에 화자를 ‘우리’가 아니라 ‘나’로 지칭하겠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보잘 것 없다 여기고, 타인이 가진 것을 대단히 여기며 부러워하는 안타까운 버릇을 품고 사는 것 같다. 자존감이 낮아 타인이 건네는 작은 호의에도 자격지심을 느끼거나, 도저히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해 무거운 부채의식을 가질 때도 많다.
여태까지는 이런 성격이 오직 ‘청각장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씩 장애란 유달리 특별하거나 중요한 비극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다. 장애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외모나 성격, 취향처럼 또 다른 개성일 뿐이라고 스스로 자주 다독이곤 한다.
타인이 건네는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은 오히려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언젠가 나도 가진 것을 베풀고 도울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은 나를 더 섬세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그렇게 적절히 기대고 받쳐주는 마음을 알려준 다정하고 따뜻한 친구가 곁에 있는 커다란 행운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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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에세이 [안 들리지만, 그래도] 출간
동치미 출판사 대표
@dongchimi_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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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스타1000

글 | 이동희 ‘동치미’ 출판사 대표

삽화 | 전보람 일러스트레이터

발행 | 2021-05-06